아무것도 없는 공간.
그런 곳에서, 시연은 깨어났다.
무,공허 뭐 이런 곳을 지칭하는 말이 많지만, 좀더 피부에 와닿게 설명하자면...그래, 위,아래의 개념조차 느껴지지 않는 이 공간. 쉽게 말해 우주 한복판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뭐 곳곳에 선같은게 보이긴하지만.
우주가 한없이 검은 공간이라면, 여긴 한없이 하얀 공간이지만.
다만, 시연이 바라보고 있는 쪽으로 두 개의 갈림길이 나 있었다.
이곳에 온 사람들의 첫 반응은 항상 같다.
먼저 눈을 비비고, 주위를 둘러본 뒤, 자신이 공간 한가운데 떠 있다는걸 깨닫고 놀란다.
시연도 별 다르지 않다. '그것'은 수없이 반복되왔던 그 모습을 보고, 한숨을 쉰다.
"에휴...."
자그마한 한숨소리에 놀라 시연은 자기 앞을 보았다.
그 곳에는, '그것'이 있었다.
검은색의 구체 가운데에 그저 눈과 입만이 있다.
괴기하긴 하지만, 비현실적이어서 공포감이나 당혹감을 느낄수도 없다. 그저 잘 만들어진 모형 장난감.
아이들이 던지고 놀기 딱 맞는 크기이다.
말만 하지 않는다면 장난감으로 볼 수 있겠지.
하지만 그것이 말을 한다는 사실에, 시연은 놀라며 물었다.
"넌 뭐지?"
이것 또한 '그것'은 수없이 들었던 말. 어째 인간이라는 것들은 얼마나 지나도, 어떤 사람이 와도 패턴이 변하질 않는다.
그것에 다 시한번 답답함을 느낀다.
"난 너희들이 '세계'라고 부르는 존재, 혹은 '우주', 혹은 '신', 혹은 '진리', 혹은 '전체', 혹은 '하나', 그리고 나는 '너'다."
사뭇 진지하게 말했지만, 시연은 폭소를 터뜨렸다.
그것에 기분이 나빠진 '그것'은, 시연에게 불만인듯 물었다.
"뭐가 그렇게 웃기지?"
세연은 웃음을 멈추고 말한다.
"아니, 그거 강철의연금술사에 나오는 '진리'대사잖아? 너 뭐하는 놈이야?"
"..."
잠깐의 침묵.
'그것'은 몸의 모양을 바꾸었다.
수염을 기르고, 세상에 불만 가득해보이는 표정에, 검은 양복.
굳이 따지자면 미남에 들어가는 키와 외모. 신뢰를 주는 목소리와 말투.
다르게 말하자면 사기꾼같은 느낌.
'그것'이 다시 말했다.
"쯧, 나 나름대로는 니가 생각하고 있는 '신'에 가장 가까운 이미지로 나타나줬던건데 말이지. 괜한 배려였나?"
혀를 차며 말하는 '신'의 모습을 보고 시연이 다시 말을 이어갔다.
"괜한 배려에요, 그리고 아까 그쪽 모습은 '진리'가 아니라 플라스크속 난쟁이구요."
아차.
그래. 생각해보니 그 만화속 진리라는 녀석은 그냥 인간의 모습이었지.
이런 생각이 미치자, 신은 멋쩍게 웃음을 보였다.
"뭐, 그건 그렇고. 처음에는 반말을 하더니 내가 신이라는걸 알자마자 존댓말로 바뀌는군. 아니, 단순히 내가 너보다 연장자처럼 보여서 그런가?"
이번에는 시연이 약간의 웃음으로 대답한다.
"어느쪽이든 가정 교육은 잘 받은 녀석이구만. 요즘 애들같지가 않아."
신이 호탕하게 웃는다.
그 웃음은 거짓 웃음이 아니라, 정말 재미있어서 웃는듯 하다.
시연이 무슨 말을 할까 고민하던중, 신이 말했다.
"자, 그러면 계속 있기도 뭐하니, 걸으면서 같이 이야기 좀 해볼까? 예를 들면, 그래. 너의 이야기가 좋겠다."
".....신이라면서 그런것도 이야기해야 알 수 있나요?"
"의심도 많군. 아, 그리고 이 갈림길 중에 어디로 가고싶냐?"
"어디로 가는게 좋은데요?"
"난 네 의견을 물어본건데...그럼 오른쪽으로 가는걸 추천하지."
"그럼 그렇게 가죠. 그런데 정말 신 맞아요?"
시연이 못믿겠다는 듯이 말을 하자, 새하얗던 공간이 수많은 글자와 차트, 그리고 사진으로 뒤덮였다.
그것들을 본 시연은 당황해서 걸음을 멈추었다. 그 '자료'들은 시연이 이때까지 살아왔던 것에 대한 데이터였다.
당황한 시연을 뒤로하고, 그것을 신은 걸으면서 읽어 나가기 시작한다.
"이시연. 남자. 2남 중 막내. 양친 생존. 176cm에 몸무게 62kg. 나이 19세. 건강. 서연고등학교. 표면상 성적 우수. 여기 온건 교통사고 때문인가? 뭐 그 외에도...."
객관적인 데이터를 신이 계속 읽어나간다.
그 데이터들을 들으며, 시연은 역시 죽은거구나. 라고 다시금 실감한다.
얼마나 지났을까. 신이 시연에게 말을 걸어오려 하자, 시연이 먼저 말한다.
"어린나이에 죽었다고 위로할거면 하지 마요. 필요 없으니까."
그 말을 듣고, 신이 다시금 크게 웃는다. 이번에도 정말 재미있어서 웃는 웃음이다.
"너같은 꼬맹이, 수도 없이 봐왔어. 꼬맹이만 아니라 어른도 있었고. 새삼스럽게 위로해주지도 않아. 다만 듣고 싶을 뿐이지."
"뭘 듣고 싶은데요? 어차피 다 알잖아요?"
"아무리 나라도 인간의 마음은 모르거든."
그 말에, 시연의 말문이 막힌다.
수많은 종교들이 각각의 차이가 있지만, 공통된 것이 있다. 신은 인간의 모든것을 알고 있다. 라는 것이다. 그러니까 '전지전능'한 신이 아니겠는가. 그러니까 사람들이 믿는 것이고.
그런데 눈 앞의 이 신은 인간의 마음을 모른다. 라고 하고 있다.
그렇다면 그건, 인간과 다를게 없지 않나?
이런저런 생각으로 머리가 혼란스러운 사이, 신은 다시 이야기를 시작한다.
"이번에는 저런 데이터가 아닌 니가 생각하고 기억하는 너의 인생을 듣고 싶은데?"
시연은 한숨을 쉬며 말한다.
"하아.....꽤 많이 걸릴껄요? 재미도 없을거고. 기억도 잘 안나고"
"상관없어. 어차피 '문'까지 가려면 시간은 많이 걸리고, 재미를 원하는 것도 아니고, 네 기억쯤은 내가 살려주면 되니까"
'기억쯤은 내가 살린다' 라는 말에, 역시 신이긴 신인가 보네. 라고 시연이 생각한 순간, 잊었던 기억들이 되살아났다.
기억의양은 방대하여, 말 그대로 시연이 태어났을때부터 죽을때까지 오감으로 느꼈던 모든것, 매 순간이 기억나는 수준으로.
그것을 바탕으로, 시연이 자신의 인생에 대해 입을 열었다.
"어차피 제가 원해서 태어난 것도 아니었어요. 조부모가 원했었고, 부모님이 그 기대에 부응해서 아이를 갖게 되었고, 그게 저였죠. 굳이 따지면 조부모님 때문에 태어난거에요.
어릴적에도 가정환경은 좋았다고 생각해요. 부모님 덕분이었죠. 6살때, 피아노를 시작해서 대회에서 상까지 탔죠. 정말 재밌었어요. 부모님이 시키긴 했지만, 부응하면 기뻐해줬으니까. 그리고 정말 재밌었으니까.
초등학교에 들어가서, 여러번 반장을 해봤죠. 공부 성적도 음악하는 것 치곤 괜찮았고. 학생회장도 해봤구요. 그것도 부모님이나 선생님, 친구들이 추천을 해줬어요. 그리고..."
"아 잠깐, 어디로 갈래? 추천해줄수도 있는데."
신이 이야기를 끊고 물었다.
다시 갈림길.
시연은 잠시 고민하다가 첫번째 갈림길처럼 신의 추천을 받고, 그 길을 걸으며 계속 이야기했다.
"'이걸 하면 도움이 될꺼야' '너한테 좋은 일이야' '나만 믿으면 돼'
그런말을 들으면서 부모님,선생님이 시키는 일을 다 해드렸어요. '피아노'를 원하셨기에 피아노를 쳤고, '모범적이고 활발한 아이'를 원하셔서 그렇게 행동했구요.
그렇게 중학교를 올라갔고, 별반 달라지지 않았어요. 피아노도 재밌긴 했지만 대회에서 상타는 일은 적어졌고.
많은걸 부모님때문에 했죠. 부모님 때문에 공부도 잘 할 수 있었고, 예의바른 아이로 컸죠.
사실은 예술 고등학교를 가고 싶었지만, 부모님이 피아노보다는 공부를 원하시던 눈치여서 눈치껏 입시명문 서연고등학교를 갔죠.
그 때부터, 제 인생은 망가지기 시작했다고 생각해요.
서연고등학교는 비평준화고등학교였고, 그런만큼 전국에서 중학교때 공부 잘한다는 애들이 모였어요.
중학교때 부모님때문에 하던 공부도 한계가 있었어요. 1학년때는 상위권이었지만, 2학년때는 중위권, 3학년때는 하위권으로 떨어졌죠.
부모님한테 말해보지도 못했어요. 어차피 그 사람들은 내가 명문 대학교를 가길 바랬으니까...기대 때문에 말하지 못했죠.
그래도 나름대로 노력은 했다고 생각해요. 친구들과 선생님이 추천해주는 인터넷 강의를 보고, 공부도 해보고. 부모님이 추천해준 학원도, 과외도 했었죠.
하지만, 더 이상 성적은 오르지 않았어요. 답이 없는 수준이었죠."
"그래서 컨닝을 했다?"
침묵.
"...뭐 '표면적 성적'은 좋았죠. 아니 좋을수 밖에 없었어요. 다 컨닝이었으니까.
그렇게 컨닝을 하니까, 모의고사 성적은 순식간에 올라갔죠. 하위권에서 중위권으로, 중위권에서 상위권으로....
대신 내신성적이 안좋게 나오긴 했지만, 아무도 신경쓰지 않았어요. 어차피 수능이 중요시되는 학교였으니까.
선생님도, 부모님이 절 보는 눈이 바뀌었죠. '역시 머리는 좋은데 공부를 안했었던것 뿐이다' 라면서 즐겁게 웃었어요.
.....남의 속도 모르고.
그리고 수능날이 됬죠. 다시는 생각하기도 싫은.
모의고사처럼 감독이 느슨하지 않았죠.
어차피 그런 눈속임, 수능을 치고 나면 다 들통날거라 생각했어요.
가채점 결과, 컨닝해서 치던 모의고사랑은 150점 이상 차이가 났죠. 하하
그런데.
친구들한테도, 선생님에게도, 부모님에게도 모의고사성적처럼 말했어요.
학교도 신났고, 부모님도 신나하셨죠.
그렇게, 전 스스로 인생의 타이머 버튼을 눌렀어요.
수능 성적표가 날아오기전까지의 1달간이라는 여생을.
뭐 자살할 생각이었지만......교통사고로 죽을줄은 몰랐네요.
어디서부터 잘못된걸까.
저는 그저 시키는대로 잘 살아왔다고 생각해요. 그냥 태어났고, 추천해준 대로 피아노를 쳤고, 추천해주는 공부법으로 공부를 했고.
근데 도대체 왜! 내가 다 책임을 져야하는거냐고...개나소나 내가 책임질테니 하라고 해놓고선!
그저 시키는 대로 했는데.........."
시연이 이야기를 하는 동안 수십번의 갈림길을 만났고, 그 때마다 시연은 신이 추천한 길로 갔다.
처음에는 고민하는듯 하더니, 다음부터는 신의 추천대로 길을 선택했고-
마지막 갈림길에 도착했다.
말이 없는 시연을 두고, 신이 입을 열었다.
"뭐 그런 인생도 있는거 아니겠어? 이야기 잘 들었다.
헤어지기도 아쉽지만 내 역할은 여기까지라서 말이야. 어느쪽으로 갈래? 문으로 이어지는 길이거든."
시연이 다시 입을 열었다.
"......왼쪽으로 갈께요."
시연의 말에, 신의 얼굴에서 웃음기가 사라지고, 가라앉은 목소리로 물었다.
"이번에는 추천해달라고 하지 않는군."
"마지막쯤은 추천따위 없이 제가 원하는 곳으로 가고 싶거든요."
"나는 오른쪽을 추천해주지. 너같은 성격이면 딱 맞을거야. 신인 내가 보장하지."
그 말에 시연이 웃으며 대답했다.
"아뇨, 왼쪽으로 갈게요. 제가 책임질게요. 여기까지 같이 와주셔서 감사합니다."
신도 웃으며 물었다.
"그런데 왜 굳이 길을 추천 받은거지? 지금처럼 선택하면 됬잖아?"
"음....그 많은 갈림길, 일일히 생각하기 귀찮았고, 당신이 나보다는 잘 알테니까요. 별 이유는 없어요."
"하하, 귀찮다라..."
그렇게 말하며, 시연은 왼쪽으로 걸어가기 시작했다.
그런 시연의 등뒤로 신이 말했다.
"지금부터 말하는건 너의 이야기에 대한 보답이라고 해야하나? 감상이야. 신경쓰지 않아도 돼. 어차피 기억도 제대로 못하겠지만.
요컨데 너는 너의 인생을 네가 책임지는게 싫어서 남이 시키는 대로 했다는 거군?"
네가 말한 너의 인생에서, 네가 선택하고 책임진게 뭐가 있지? 남들이 시키는대로 해온것뿐이잖아? 남들이 시키는 대로 하고 잘 안되면 '너 때문에!', '책임 져준다며!' 'xx 때문에'.
그런 변명을 언제까지 할 생각이었냐? 웃기지 마라. 꼬맹이.
네가 책임지는게 싫어서, 실패해도 누군가에게 책임을 떠넘기고 싶어서 시키는대로 살아온거 아닌가?"
신은 태연하게, 언제나 그렇듯이 안면에 웃음을 머금으며 이야기했다.
"부모님은 너에게 선택지를 줬지. 피아노를 계속 할건지, 아니면 공부를 할건지.
그래, 그 선택부터였군. 중학교때부터 대회에서 상을 잘 타지 못하고, 너보다 잘 하는 아이들이 많은걸 본 너는 피아노를 선택하기 싫었다. 그래서 피아노를 피해 공부를 선택했지.
왜냐하면 그 쪽이 잘못되었을때 '공부를 권한' 부모님 책임으로 떠넘길수 있었으니까. 부모님이 눈치를 줬다? 기억을 맘대로 바꾸지 않았으면 좋겠군. 두개의 선택지를 제시했을 뿐이야.
공부방법? 결국 공부는 스스로 하는 것이라는걸 잘 알텐데? 고등학교 수준의 문제에서 방법의 옳고 그름을 이야기하면서 네가 노력하지 않은걸 남에게 책임을 씌우는건가?"
"......."
말없이 있는 시연에게, 다시 신이 말했다.
"선택에는 책임이 있다지만, 선택하지 않는 것에 대한 책임은 더 크지.
누구든지 추천은 받을 수 있어. 맨토를 가질수도 있지.
이제는 인생의 길을 선택하는 것조차 생각하기 귀찮다고, 힘들다면서 선택을 남에게 미루어버려.
하지만 사람의 인생은 누가 선택해주는게 아니야. 처음부터 끝까지 자기가 생각해서 선택하고 자기가 책임을 져야하는거라구.
그것조차 하지 않는 사람을 보고 패배자라고 하는거다.
다음부터는 타인에게 선택을, 그리고 책임을 전가하지 마라. 꼬맹이"
그 말을 끝으로, 시연은 의식을 잃었다.
"....아!"
의식이 회복하고 눈을 떴을 때, 이전과 마찬가지로 새하얀 공간이 눈에 보였다.
'....아직도 그 장소인가?'
멍한 머리로 그렇게 생각하고 있을때
"시연아!!! 시연아!!!!! 아이고 내 아들....."
부모님의 목소리가 들렸다.
목을 돌려보려고 했지만, 통증때문에 돌리지 못하고 곁눈질을 했다.
그곳에는 부모님이 귀신이라도 본듯이 놀란 얼굴로, 그러나 눈물로 범벅이되어 나의 이름을 부르고 계셨다.
'아프다'
통증이 있다. 부모님의 목소리도 들린다.
그말은 곧-
'살아있구나. 나.'
용케 그 교통사고에서 살아남았다. 분명 죽었을텐데...신까지 보고 온거같은데.
무슨말을 먼저해야할까. '사랑해요' '괜찮아요?' '죽는줄 알았어요?' '이때까지 속여서 죄송해요' 아니면 애니메이션처럼 '다녀왔어요?'
잘 움직이지 않는 입술을 간신히 떼고 말했다.
그 움직임을 알아차리셨는지, 아버지가 다가오셨다.
그리고, 나는 거의 들리지 않는 목소리로, 하지만 확실히 말했다.
"...저 다시 피아노를 치고 싶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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